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18 민주화운동/학살 (문단 편집) === [[화염방사기]] 살상 의혹 === [[http://db.kdemocracy.or.kr/isad/view/00714067|화염방사기를 운반하는 계엄군 사진]] [[파일:그림3.png|width=480]] [[파일:그림4.png|width=480]] 5.18 때 공수부대가 대검뿐만 아니라 '''{{{#red 화염방사기}}}'''까지 시위진압에 동원했다는 주장과 증언이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공수부대는 이날(19일) '''화염방사기'''까지 시위진압에 사용한다. 화염방사기는 살상용 무기다. 이날 시위대에 대한 위협용으로 등장한 화염방사기는 그 뒤 21일, 전남대 앞과 시청 앞에서 실제 진압용으로 사용된다.(212쪽) >---- >이 시간(20일 오후 2시 20분쯤) 서방 삼거리에서는 공수부대의 '''화염방사기'''가 불을 뿜어 시위대 선두에 섰던 시민들이 까맣게 그을려 쓰러지는 장면이 목격되며...[* 『오월의 사회과학』(최정운)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255쪽) >---- >3공수특전여단의 진압은 곤봉세례와 최루탄 사용에 그치지 않는다. '''화염방사기'''까지 시민·학생들의 시위진압에 동원된다.[* 88년 청문회 과정에서 당시 지휘관들은 화염방사기를 진압에 사용한 사실은 시인했으나, 물감을 넣어 사용했을 뿐 살상용 화염방사기 사용은 없었다고 부인한다.] 방위병 신분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화염방사기 공격을 받은 최병옥 씨(당시 21세)는 간신히 화염을 피하긴 했지만 고열로 얼굴이 익는 피해를 입는다. > >"차를 타고 가던 중 공수부대의 공격을 받자 인근 주택 화장실로 피신했다. 이미 3명이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곳까지 쫓아온 공수가 갑자기 화장실 창문으로 '''화염방사기'''를 대고 불을 뿜어냈다. 순간 숨이 꽉 막혀 뛰쳐나가 그 집 안방 장롱 속에 숨었으나 이내 붙잡히고 말았다. 끌려간 다음 날부터 얼굴은 껍질이 벗겨지고 진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 >화염방사기의 등장은 곧 공수부대의 진압이 이성을 잃었음을 의미하며(...)(302 ~ 303쪽) >---- >『正史 5.18』, 광주매일 正史 5.18 특별취재반, 1995 >이윽고 (20일) 오후에는 대규모로 시위가 전개되었고 2시 30분경 서방삼거리에서 공수부대는 '''화염방사기'''를 쏘아 여러 명의 시민들이 그 자리에서 타죽었다. >---- >『오월의 사회과학』, 최정운, 1999, 137쪽 >급한 김에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는데 문을 닫고 보니 4명이 거기에 같이 갇힌 꼴이 되었지요. 그런데 아뿔사! 공수부대 놈들이 기어코 우리를 쫓아와 화장실 창문에 '''화염방사기'''를 대고 불을 뿜어내지 않겠어요. 순간 숨이 꽉 막혀 문을 열고 뛰쳐나갔어요. >---- >최병옥, [[http://cnu518.jnu.ac.kr/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222&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D%99%94%EC%97%BC%EB%B0%A9%EC%82%AC%EA%B8%B0&sop=and&page=1:|화염방사기에 얼굴이 익어버린 사람(전남대학교 5.18연구소)]] >소방서 앞에는 꽤 많은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계엄군들은 '''화염방사기'''를 들고 시민들을 해산시키려고 하였다. 직접 사람들을 향해 쏘지는 않고 높은 각도로 쏘고 있었다. 시민들을 살상하기 위해서 쏘는 것이 아니라 위협용으로 쏘는 것 같았다. 나도 군대를 갔다 왔지만 말로만 들었지 총구에서 불이 뿜어나오는 화염방사기는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아무리 위협용이라 해도 무기 하나 들지 않은 시민들을 향해 살상용 무기인 화염방사기를 쏘아대는 것을 보자 어이가 없었다. 너무나 잔인했다. 한편에서는 분노가, 또 한편에서는 불안함과 두려움이 생겼다. >---- >최충용, [[http://cnu518.jnu.ac.kr/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223&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D%99%94%EC%97%BC%EB%B0%A9%EC%82%AC%EA%B8%B0&sop=and&page=1|화염방사기 사용 목격(전남대학교 5.18연구소)]] 그 밖의 화염방사기 사용 관련 증언들이다. * [[http://cnu518.jnu.ac.kr/bbs/board.php?bo_table=sub6_03_01&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ED%99%94%EC%97%BC%EB%B0%A9%EC%82%AC%EA%B8%B0&sop=and&page=1|전남대학교 5.18연구소 - 화염방사기 살상 증언]]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010900329123008&edi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6-01-09&officeId=00032&pageNo=23&printNo=15647&publishType=00010|「5.18」때 화염방사기 사용(경향신문, 1996.1.6)]] 그러나 1995년 검찰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화염방사기 사용설을 인정하지 않았다. ><화염방사기 사용 여부> >군 관계자들은, 화염방사기는 토치카 또는 장갑차 공격용으로서 인체에 화염을 방사하였다면 전신 중화상으로 대부분 사망하고 말았을 것이라며, 광주에서 화염방사기로 화염을 방사한 적이 없고 당시 화염용 약품 자체가 지원된 일이 없으며, 다만 소요진압용 작용제(CS 분말)나 소요 군중 식별용 유색수를 넣어 이를 살포하는 데 화염방사기를 사용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바, 달리 화염방사기로 화염을 방사하거나 화염방사에 의한 화상 사망 사실을 인정할 자료를 발견하지 못하였음(211~212쪽). >---- >『5.18 관련 사건 수사결과』,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검찰부, 1995 때문에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개정증보판)에서는 계엄군이 살상용 화염방사기를 사용했다는 내용은 싣지 않았다. >(19일) 오후 3시경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 운집한 시민들이 소방서 부근에 진을 치고 있던 공수부대원들에게 돌을 던졌다. 공수대원들이 달려오면서 공중을 향해 '''화염방사기'''를 쏘자 엄청난 가스가 뿜어져 나왔다.(108쪽) >---- >그 시각(20일 오전) 광주역, 공용터미널, 서방 삼거리를 경비하던 3공수부대는 '''화염방사기'''로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화염방사기는 최루가스를 대량 살포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했다.(138쪽) >----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전면개정판),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7 하지만 박종규 당시 3공수여단 15대대장의 체험기에는 당시 공수부대가 '''화염방사기'''를 사용했다는 내용이 있다. > 11, 12, 13대대가 광주역에 무사히 도착하는 데는 엄청난 위험이 있었다. 대대가 완전히 포위되어 시위 군중의 돌과 몽둥이에 대대가 해체 직전의 위험까지 갔다고 한다. '''화염방사기''', 가스분출기로 겨우 통로를 열어 쫓기듯 돌아왔다고 한다. >---- >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51393&C_CC=BB|출처: '광주 진압 공수부대 대대장 手記'(조갑제닷컴)]] 그리고 2007년 국방부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3공수여단의 「전투상보」에는 광주역에서의 작전이 "가스탄, '''화염방사기''', '''[[M203 유탄발사기|M203]]발사기''', E-8발사통" 등으로 시위대를 제지했다며 발포와 과격진압 사실을 은폐했다. >---- >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2007, 81쪽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